정재서, 이야기 동양 신화1(황금부엉이)를 읽다.
언제였던가, 학교도서관 4층 참고열람실 창가에서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곰브리치도, 하우저도, 아렌트도 그때서야 처음으로 차분하게 읽었다. 때론 여덟시 반 폐관 시간에 쫓겨 후루룩 책장을 넘기기는 했어도, 여적 그때의 행복감은 학교 도서관의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정색하고 앉아서 책장을 넘기다가 지루해지면, 때로는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문학 계간지들을 심심풀이로 읽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문학동네> 권말 부록 형식으로 한동안 도정일 선생이 썼던 신화 이야기. 아버지 우라노스를 죽이고 제왕이 되었던 크로노스는 그 역시아들에게 살해될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냉큼냉큼 먹어 치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특한 아들 제우스는 가이아의 도움으로 자신 대신 돌맹이를 아버지에게 멕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세이돈이나 하디스 같은 엄밀히 보면 그의 형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프로이드에 의해 발견(?)된 부친 살해 욕망에는 이런 신화적 배경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대목이다.
정재서의 이 책에서도 동양의 갖은 신들이 출몰한다. 반고, 여와, 서왕모, 예, 황제, 염제(신농), 태호(복희), 소호, 전욱, 치우, 요순우탕문무주공 이윤 강태공....
서양신화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신화 중 하나일 뿐이다. 서양 신화를 이야기한 도정일 선생이 자연스레 인도신화로 넘어갈 수 있었듯이. 우리에게 서양신화는 그저 텍스트일 뿐이다. 읽고 해석해야 할. 인도신화처럼 말이다. 그러나 동양의 신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눈에 거슬렸던 것은 중국, 혹은 동양의 신들을 들먹거리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시도였다. 신농, 복희, 치우, 예(복숭아 몽둥이로 맞아 죽은 신이라니....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제사 음식으로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단다)의 신화적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책이 의지하는 언어권 화자들과 대응시키려 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근대적 인식일 뿐이다. 근대, 민족, 모국어, 국가... 이런 것들과 따로 떼어 놀 수 없는 신화 이해(그것도 선이해)였단 말이다. 시대착오도 이런 시대착오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니까 신화이다. 텍스트에 갇혀 있는 신화는 신화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단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신화는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힘과 의미가 뒤엉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내 이름자에도 이런 신화적 이야기가 발현된다. 요순우탕문무주공. (우리 사촌들은 돌림자 뒤에 문무주공이란 글자를 하나씩 순서대로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지금 이곳에서 신화가 넘쳐나는가? 왜 그들을 되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양신화를 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리의 신화를 읽는가.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면 우리는 우리인가? 신화가 텍스트 안에 얌전히 머물러 있지 않는 게 정상이라 해도, 신화는 이미 한참 전에, 그것도 각고의 노력 끝에 비신화화/탈신화화된 것 아닌가. 탈신화의 재신화화...??? 신화가 반복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닐 터, 신화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이 계열은 어떤 것인가....
서사는 오래 지속된다. 미래처럼.
(2004.9.30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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