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이에게 해 줄 멋진 말이 없을까 하고(멋진 말이란 게 대개는 돌아보면 십중팔구 유치한 말이 되어 버리지만) 눈을 희번뜩이고 여기저기 둘러보다 어느 시인의 시집을 한권 빼어든다.
문학동네에서 [포에지 2000]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으로 벌린 기획 시리즈 중 한 권. '우리 시문학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절창을 복원해 낸다'고 출판사는 책날개에서 기염을 토한다.
사십대 중반이 넘었을 이 시인의 20대 사진이 표지에 걸려있다. 정말 비린내가 난다, 고 할 정도로 애띤 얼굴이다. 이이도 그동안 살이 꽤나 붙었군, 하며 동류의식 비슷한 걸 느낀다.
읽히지가 않는다.
방바닥에 모래를 뿌려 놓고, 아니 자갈을 깔아 놓고 누워 있는 듯 거북했다.
누군가 90년대, 특히 중반 이후의 시가 연성화 되어 연애시 수준이라며 눈을 흘기더만....... 읽을 수도 없는데 쓸 수 있을 리 만무다. 이렇게 등짝이 배기는 걸.......80년대 시
2.
오히려 오랜 동안 눈을 잡아 끈 건 속지에 내가 괴발새발 쓴 몇 자.
“영풍문고에서. 1997.7.20.kbm”
97년에도 시집을 샀구나 하는 생각.
이제는 책을 살 때만 써먹는 내 필명 케이비엠. 다 짠하다. 뭔지 모르게.
3.
그리고 맨 위에 휘갈겨 쓴 어떤 이의 삐삐번호.
015-8435-1774. 번호만 있고 이름이 없어 누구의 번호인지 모르겠다.
누구일까. 나는 이 번호를 누르고 또 어떤 말을 속닥거렸을까.
내가 처음 받은 삐삐 번호는 97년 2월, 졸업식날, 후배들로부터 받은 015-8435-3964다. 그날 너무 좋아 나는 신촌의 '자유인 투'라는 술집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술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삐삐 왔습니다!!
누군가 집에 가다 나한테 삐삐를 쳤더랬다. 다 짠하다 뭔지 모르게.
4.
나와 잠자리의 갈등1
다른 곳은 다 놔두고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고
이런 게 90년대 시의 연성화라면, 나 연성화에 한 표 던지련다.
5.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눈이 내린다고 시인은 했는데,
아침부터 그야말로 지지리도 못난 내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비가 내렸고,
나는 일어나서 내내 비가 그치기를 기원했다.
요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비 그치기를 바랐던 이유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2003.10.13.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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