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선운사는 입구부터 흥청댔다. 빼곡한 장어집들 사이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두서없이 늘어서 있고, 일주문까지는 모시송편과 복분자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한결 같이 등산복을 빼입은 이들은 달려드는 날벌레를 쫓느라 바빠 이른 단풍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붉은 동백꽃을 기대하고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운사 마당은 왠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사람들 역시 갈피를 못 잡고 스산해 보였다. 안내사의 썰렁한 농담에 등산복들이 답으로 건낸 박수소리가 헐렁한 산사에 흩어질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르팍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 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솜사탕을 받아들고 좋아했다.
해질녘 도착한 숙소에서 서둘러 빠져 나와 격포의 낙조를 보았다. 순식간에 바다로 사라지는 붉은 해. 하도 빨라, 무슨 느낌이고 감정이고 맛볼 새도 없다. 육당이 조선십경 중 하나로 격포 낙조를 꼽았다더니, 과연 조선 삼대 천재의 눈썰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풍광을 기어코 붙잡아 민족/국가에다 갖다 붙이는 능력이라니. (2012.10.21.)
2.
아침 산책길. 해변가를 걸어볼 요량으로 나섰다가, ‘해넘이 채화대’ 앞에 걸음을 멈춘다. 앞뒤를 살펴보니 20세기의 마지막 해(격포)와 21세기의 첫 해(호미곶)에서 불을 받아 새천년을 맞이하는 행사가 있었던 모양. 새천년맞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이어령. 역시 그다운 발상. 그러나 그 역시 이런 짓이 민망했던 겐지, 이 행사가 국가 행사라는 것을 몇 번에 걸쳐 강조한다. 누군가 근대의 특성으로 시간/공간의 균질화와 이것의 국가화를 이야기했다더니 딱 그 모양이다. 1999년 12월 31일 17시 30분 17초(격포)와 동경 129도 24분 3초(호미곶), 그리고 낙조와 일출의 광경이 모두 국가적 층위에서 수렴된다. 최남선과 이어령. 그들은 동시대인이었다.
종일 내린 비는 점심때가 되어서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채석강과 적벽강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우리는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일정을 변경해 숙소에 있는 워터파크에서 물놀이를 했다. 감기 기운이 있던 아이는 그러나 물벼락에 신났고, 덩달아 아내와 나도 분주했다. 놀이도 돈 주고 사야하는 시대, 아니 살 능력이 없으면 놀 수도 없는 시대. 문뜩 아찔했다. 내 아이는 맘껏 뛰어 놀 수나 있을까. ‘바다전망은 2만원 추가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에 실망했던 나는 1시간에 4만 원쯤 든 물놀이에 만족했다. 균질화, 국가화되기도 전에 시간과 공관은 살뜰히 상품화된다.(2012.10.22.)
3.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거셌다. 아침 산책길에 채석강 머리 위 닭이봉에 올랐다. 인적 없는 누각엔 어깨가 아리도록 부는 바닷바람만이 시끄러웠다. 부안군이 조성한 ‘마실길’ 주위는 새로운 호텔을 짓느라 공사가 한창이었고, 군데군데 옛 민밥집들은 이제 함바집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숙소에서 짐을 정리해 마지막으로 해안도로를 돌다가 차를 세워 적벽강 꼭대기에 올랐다. 서해바다를 관장한다는 개양할머니를 모신 수성당이 거친 바닷바람을 맞고 거기에 있었다. 때마침 박수무당이 징을 둥둥 울리며 굿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채석강이라는 둥 적벽강이라는 둥 이름 지은 이곳들은 모두 뭍이 바다를 범할 듯 벼랑을 이루어 뻗쳐나간 형상이다. 그러나 바다가 이를 순순히 용납할 까닭이 없을 터. 이렇게 바람이 거센 날이면 영락없이 바다와 육지가 서로 힘을 겨루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딸 여덟을 낳아 각 도에 하나씩 시집보내고 막내를 데리고 살았다는 개양할머니를 불러야 하는 것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이른 봄 노란빛으로 찬란했을, 그러나 지금은 붉은 흙을 황망히 드러내고 있는 유채밭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이 길을 오고갔을 무당들을 생각해 본다. 격포의 낙조를 배경 삼아 그들은 개양할미에게 무엇을 빌었을까? 적벽강의 수성당에서 빌던 그 무당들과, 채석강의 해넘이 채화대에서 민족국가의 뉴밀레니엄을 축원하던 새천년위원회는 결국 같은 것인가, 아닌가.(2012.10.23.)
4.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소사에 들러 전나무길을 걸었고 가람의 정갈한 배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는 삼신각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곰소에서 젓갈을 사서 싣고, 또 배부르게 먹고 딴에는 부지런히 차를 몰았으나, 서울의 6시는 여전히 정체중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격포항의 바닷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찻소리와 적벽강의 바닷바람보다 더 차가운 밤기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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