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일대 서원답사 여행 .... 후기

삶읽기 2006. 8. 17. 14:31

1.

무의식 하면 대개 머릿속과 관련된 무엇으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장 강력하고 의미심장한 것은 몸에 새겨진 무의식이리라. 예컨대 두 발과 두 손이, 그러니까 사지가 모두 따로따로 (질서 있게) 허우적거려야 되는 운전이야말로, 신체에 새겨진 무의식이 얼마나 '食怯'할 만한 것인지 알게 한다. 왼손으로는 핸들을 우로 돌리면서 왼발은 클러치를 밟고, 동시에 엑셀에서 오른발을 거두고, 그러는 사이 오른손은 기어를 중립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3단으로.... 능숙한 운전자는 이런 동작들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저 몸에 새겨진 '무의식의 흐름'이 운전이라는 몸짓을 완성해 갈 뿐.


2.

버스에 오르면서 털어넣기 시작한 소주가 연수기간 내내 몸속에서 돌돌돌 소리를 내며 굴러다녀 종국에는 한쪽 귀를 땅에 대고 깨금발을 뛰면, 혹 팔을 세차게 흔들어대면 그 끝에서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뭔가가, 흐흐흐 기분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뽁뽁’ 하고 나올 것 같았다, 고 하면 자발없는 자랑이 될까 아니면 말라비틀어진 반성이 되는 걸까.

하지만, 술이 아니고도 내 몸에는 2박3일 연수의 일정이 차곡차곡 새겨져 있다. 슬쩍 밀쳐내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내 발바닥을 꽉꽉 눌러주던 새재의 길, 콧구멍과 귓구멍을 시원스레 무시로 드나들던 그 한적한 길을 걷다가 우리는 ‘가을, 다시 이 길을 걷자’고 약속하고야 말았다. 그날 저녁 원장님의 여헌 선생 관련 말씀은 피 안 통해 저릿저릿해진 종아리에 담아 두었고, 다음날 쉼 없이 ‘너므 조상’한테 절하면서는 무르팍으로다가 ‘우리 엄니한텐 은지 절해보고 안 혔나’ 곰곰 생각했다.

어둠이 깔린 동락서원 대청에서 퍼지고 앉아 폭폭한 감자를 먹으며는 장수방 선생님만의 멋스러움을 목구멍으로 되새김질했고, 2학년 총무님의 발표 내내 시린 엉덩이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덧 이야기는, 여헌의 도통설이 정치적 타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거쳐 근기 남인의 연원으로까지 흘러들고 있었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내) 연수의 백미는 둘째 날 밤 구미대교 아래에서의 술자리.

3학년, 2학년 총무님들의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던 노랫가락은 자꾸만자꾸만 손바닥에 와서 부닥쳐 ‘짝짝’ 소리를 냈고, 김세봉 선생님의 동음이의어 유머는 내 머리통을 쨍쨍 울릴 정도로 시원(혹은 썰렁)했으며, 7기 백범영 선생님의 율동을 곁들인 개구리송은 초고도근시인 내 눈알을 황급히 주어 담아야 할 정도로 기괴한(? 혹은, 숭악한) 것이었다. 여기에 김결 선생의 개똥벌레가 가슴을 짠하게 하니, 나 역시 음정박자가사 모두 ‘저그 저짝’으로 팽개치고 고성방가에 동참할 밖에....


3.

이렇듯 2박3일 연수는 내 발바닥에, 귓구멍과 콧구멍에, 종아리와 무르팍에, 목구멍과 엉덩이에, 손바닥과 머리통과 눈알에, 그리고 내 가슴에, 은근히 새겨져 있다. 어느 날 꿈에 진하게 화장하고 예고 없이 나타나는 무의식처럼, 내 몸에 박힌 하계 연수는 아마도 한동안 불쑥불쑥 내 몸 곳곳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리라.

내가 일주일에 두어 번 유도회에 나가며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 역시, 한문 해득력을 높인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라, 내 몸에 무언가를 자꾸만 새겨 넣는 일일 터. 그래서 무섭고 겁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을 비틀고 웅크리고 벌렁 나자빠지고 그러다 보면, 나만의 무늬가 만들어질 테고, 그러면 혹 이름값 할는지도 모르지....

炳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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