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사건과 의미/진리, 들뢰즈와 바디우

pourm 2025. 8. 18. 17:13

들뢰즈의 사건, 그리고 의미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의 관점을 빌려 물체와 비물체를 구분한다.
예컨대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의 방망이에 맞아 외야의 펜스 넘어로 날아갔다. 이것은 물체에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공이 파울 폴대 안쪽에 떨어졌느냐 바깥쪽에 떨여졌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물체적인 것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물체적인 것들의 표면 효과로서 생성되는 '의미'가 바로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비물체적인 것, 즉 언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물체적인 것,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들뢰즈의 '사건'이다.('비물체적인 것'에는 시간이나 공간 같은 것들도 포함되지만, 들뢰즈의 사건론/의미론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적인 것'이므로 이렇게 단순화한다.)

카이사르/나폴레옹의 머리에 얹혀진 월계관/왕관.
그 이전과 이후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에게는 물체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종신독재관/황제가 된다는(becom), 엄청난 역사적인 '의미'가 생성된다. 
물체적인 것과 달리 비물체적인 것은 순간적으로 번쩍, 솟아났다가는 이내 사라진다. 물체적인 것은 ('이데아' 속에서) 지속하지만, 비물체적인 것은 (차이 속에서) 반복한다. 
물체적인 것은 언어/기호에 의존하지 않지만, 비물체적인 것, 사건은 대체로 언표를 통해 성립한다. (주심의 "스트리이크!"라는 외침에 우리는 환호하고, 절망한다. 왈계관/왕관이 기호임은 물론이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는 질과 연장(양)을 속성으로 하는 실체의 존재론에 대항하여 잠재성과 특이성의 장을 토대로 하는 사건/의미의 존재론을 제시한다.
비물체적인 것의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낭만주의의 신비로운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의 존재론. 이는 이미 <차이와 반복>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차이'가 힘에의 의지와 강밀도에 의한 것이라면, 의미/사건의 '반복'이 바로 영원회귀인 것이다. 강밀도는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차이와 반복.


바디우의 사건, 그리고 진리


바디우의 사건론은 역사적인 변혁/변화에 대한 사유이다.
국가는 구성원(원소)를 날것 그대로 상대하지 않고 언제나 구조화하여 (그것의 원소가 단수라도) 집합으로 상대한다. (국가는 그러한 구조가 재구조화, 매타구조화한 것.)
그러나 원소를 집합으로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모순과 공백이 발생한다. 
원소로는 포착(현시)되지만, 집합으로는 구조화(재현)되지 않는 잉여와 공백의 지점이 발생한다는 것. (이때 칸토어의 집합론, 무한론의 역설과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도입된다)
기존의 사회/국가의 문법/담론/계산법으로는 설명하거나 셈할 수 없는 존재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건=진리의 발생. 진리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에 대한 사후적 '명명'이 필수적.

1789년 우리가 프랑스혁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물론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인간과 행위와 물질적 요소들이 존재했을 것.
그러나 기존의 문법/담론으로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설명해 낼 도리가 없다.
기존의 문법과 담론에서 '프랑스혁명'은 공백이었다. 솟아오른 공백에 사후적으로 명명하기.
셈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 공백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그 진리를 끝내 지켜내려는(충실성) 투사들.
바디우의 사건론은 진리의 존재론이고 혁명의 존재론이다.

들뢰즈의 사건-의미론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이지만, 정치철학적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이론적이다.
그에 비해서 바디우의 사건-진리론은 정치철학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매우 급진적이고 계발적이다.

들뢰즈의 정치철학은 물론 가타리와의 접속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바디우의 사건론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대타자로는 해소되지 않는 잉여와 공백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관점은 물론 라캉의 실재계에서 온 것이다. 라캉에 대한 필요 이상의 꺼림칙함이 바디우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다.

이번 여름 방학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디우를 알게 된 것이고, <의미의 논리>와 <차이와 반복>을 다시 떠들쳐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의 잊고 있었던 칸토어의 무한론/집합론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