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마르셀 모스 / 앙리 위베르, <주술론>, 파이돈

pourm 2026. 4. 3. 15:57

이 달의 책 (3월)
마르셀 모스 / 앙리 위베르, <주술론>, 파이돈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주술의 본질이 (초자연적현상/신을) 강제하고 속박하는 데 있다면, 종교는 (신을) 달래고 회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비해 마르셀 모스는 <주술론>에서 주술의 본질이 (대체로 비밀스러운) 저주에 있고, 종교는 공적/제도적으로 신적 존재를 숭배한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술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공동체의 집합적 표상이 전제된다.

강제나 속박도,  달래기나 회유하기도, 또한 저주든 숭배든 그러한 행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의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와 결합된 특정한 언표(utteranc)가 전제된다.
조건을 갖춘 사람(주술사/성직자)과 미리 정해진 의례. 특정한 조건과 결합된 언표. 그때 저주와 기도는 비로소 발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효력 없는 지껄임이거나 썰렁한 농담이다.

<주술론>에서 가장 혁신적인 주장은 주술이 해당 사회/공동체의 집단적 희망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술을 오류와 오해의 층위가 아니라 과학 기술(의술, 역술, 연금술, 약제술, 점성술...), 그리고 종교와 같은 층위/레벨에 놓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모스가 보았을 때 그러한 주술은 지금 여기에서도 현대적인 주술사에 의한 특정 의례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소위 민주주의는 주술과 무관한가? 정교하게 고안된 선거 및 의회제도라는 의례, 정치 지도자라는 주술사, 그리고 아무도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그래서 모두가 그 텅빈 기호를 부여잡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집단 표상.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가 허위나 허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주술사에 의해서 실제로 병자의 병이 낫듯이, 우리는 실제로 희망찬 민주주의를 실행해 나간다. 주술사와 주술적 의례를 통해. 

그러나 치유의 기적이 오래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언제나 허약하다.
누구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계엄과 친위쿠데타를 꿈꾸고, 누군가는 빛의 혁명으로 이에 맞선다. 각자의 언표는 서로 다른 주술사가 진행하는 각각의 의례 속에서 현실적인 효력을 발휘하거나, 혹은 실패한다. 누군가에게는 내란 응징이 민주이고, 누군가에게는 윤어게인이 민주이다.

뒤르케임의 제자이자 조카인 모스는 이 책에서 '사회적 사실'과 '집합표상'을 통해 '사회'라는 것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종교에 이어 주술이라는 현상 역시 사회의 실체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술론>의 가장 큰 성과는 오스틴과 설보다 훨씬 이전에 수행이론을 명쾌히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시뮬라르크는 단지 가상이나 허위가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진실에 부합하느냐 역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과연 무엇을 실행하는가, 그것으로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이다. 
우리의 삶은 시뮬라르크에 의해 구성된다. 그 외부는? 없지 않겠으나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아마 주술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잠깐씩 고통스러운 그 흔적을 볼 수 있을지도.


그밖에 3월에 읽은 책.
<숨겨진 미래>, 장세진, 푸른역사
<대한민국의 설계자>, 김건우, 느티나무책방
<구텐베르그 은하계>, 마셜 매클루언, 커뮤니케이션북스
<쇼펜하우어>, 뤼디거 자브란스키, 이화북스
<중급 한국어>, 문지혁, 민음사
<녹색평론> 202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