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책 (4월)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 뤼디거 자프란스키, 이화북스

칸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감각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을 정초함과 동시에 인간 이상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선험적 조건 저 너머에 있는 '물자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는 따라서 말끔히 해결할 수 없는 일종의 '잔여물' 같은 것이다. 체계가 결코 해명할 수 없으나 그것 없이는 체계가 와해되는 핵심적인 요소.
그러나 칸트의 후계자들, 즉 독일 관념론을 이끈 피히테, 셀링, 헤겔은 이 잔여물을 철학의 체계에 남겨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자체'를 해명하고자 했다.
예컨대 피히테의 자아 철학. 피히테는 칸트의 날카로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의 '자아'는 '비아'와의 끊임 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정립되는 것이다. 자아는 비아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에게 한계를 부여할 때만 정립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결국 자아의 자기 정립 과정에 '물자체'가 이미 포함/내재되어 있다는 것. 피히테 철학의 '지식학'은 '물자체'의 불가지성을 제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고, 그 토대를 자아의 '사행'(사실+행위) 같은 개념을 통해 구축했다. 주체와 객체의 통일에서 비로소 자아의 자유 역시 획득된다.
(피히테는 나폴레옹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이 자아 개념을 공동체에 적용한다. '독일 민족에게 고함')
셸링의 자연철학, 헤겔의 역사철학 역시 결국 '물자체'라는 잔여물을 해소하기 위한 고투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칸트의 문제의식에 더 근접한다. 여전히 '물자체'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표상 이전에 내적 체험으로, 자신의 육체에서 느끼는 무목적적이고 따라서 맹목적인 의지, 이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철학에서의 물자체인 것이다.
"물자체로서의 세계는 거대한 의지이며 이 의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의지는 아는 것이 없으며 무작정 원할 뿐이다. 의지는 그저 의지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본문 378쪽, 드레스덴에서 작성한 노트)
이때의 의지는 그러나 인간만의 것을 뜻하지 않는다.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무기물까지도 의지를 지닌다. 물이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려는 저 도저한 의지, 한사코 음극과 결합하려는 양극의 멈출수 없는 의지, 자기장이 발산하는 의지,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는 우주의 인력!
자프란스키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우파니샤드>의 브라마 개념에 열광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기에는 불교에의 탐닉.
이 괴팍한 철학자의 후예가 그 못지 않게 괴팍한 니체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다만, 쇼펜하우어가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를 결국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해탈, 혹은 해방)을 궁극의 과제로 삼았던 것에 비해
니체는 삶/힘에의 의지를 디오니소스적인 맥락에서 찬양했다는 점에서 니체 철학은 쇼펜하우어 철학을 거꾸로 세워 놓은 형국이라고 할까.
애초 나폴레옹 군에 적대적이 않던 프로이센의 시민들이(나폴레옹 편에 섰으니, 우리 시는 안전하겠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뒤에야 나폴레옹을 비로소 점령군으로 인식하고 조국의 해방을 열망하는 애국자가 되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독일민족에게 함'은 나폴래옹의 패주 전인 1807~1808년 사이의 연설.)
아울러 피히테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개 조국의 수치를 곱씹고 민족의 영광을 다짐하는 열렬한 애국자가 되어 가던 시절, 쇼펜하우어만큼은 이런 애국적 행위를 유치한 짓거리로 보고 여기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인상 깊다.
그 밖에 4월에 읽은 책들
<이것이 인간인가>, 프레모 레비, 돌베개
<독일 관념론>, 게르하르트 감, 용의 숲
<중동태의 세계>, 고쿠분 고이치로, 동아시아
<언어의 본질 - 말은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하는가?>, 이마이 무쓰미 외, 아르테
<유전자의 기억>, 제롤 드 그루트, 이상북스
<핸드메이드픽션>, 박형서, 문학동네
<중요한 몸>, 주디스 버틀러, 알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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