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주시경, 케테 콜비츠

pourm 2005. 12. 6. 17:07



1.
용비어천가의 ㅈ,ㅊ,ㅍ 받침을 확인하고 들뜬 조선 반도의 주시경과
농민들의 분연한 외침이 무참히 짓밟힌 것에 가슴 아파했던 유럽 한 복판의 콜비츠는
동시대인이다.
(주시경이 지석영의 집에서 용비어천가를 얻어 본 것은 1907년의 일이고, 콜비츠가 농민전쟁 연작을 시작한 해가 1906년이다.)


비록 콜비츠가 십여 년 일찍 나고, 주시경이 1차대전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들은,
단연코 동시대인이었다.

거칠고 강렬한 그리하여 끝내 애잔한 콜비츠의 판화와
쉼없이 나열되고 반복되는 그리하여 종내 서글픈 주시경의 저작은
아마도 같은 지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붓을 잡는 이와 '언어'(라고 불리는 실체없는 그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는 이들의 지반은 지금까지도 같다.
'근대'라는 문제설정이 의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의 고유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예술이라는 식의 새로운 관념과
말은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따라서 말과 글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사고는
동일한 배치에서서나 가능하다.

주시경과 콜비츠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들어내는 이가 바로
노신이다.
판화로 콜비츠와 노신은 직접 연결되어 있고,
문자 개량 문제로 주시경과 노신은 (서로를 알지는 못했겠지만) 동지였다.





2.
'케테 콜비츠,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민혜숙 지음, 재원 펴냄, 1995)을 읽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동판, 1893-1898), 농민전쟁 연작(동판, 1906-1908), 전쟁 연장(대부분 목판, 1921-1925) 등에서 콜피츠는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그의 분노와 연민을 충실히 새겨넣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작품들을 보기 위해 콜비츠를 열었으나
거기에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가 있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후기의 작품들은 말 그대로 계발적이다.
10년대 그녀를 움켜 쥐었던 죽음은 30년대에 와서 그녀에게 물끄러미 손을 내밀고, 그녀는 죽음을 영접한다. 죽음은 그녀의 친구이고, 소녀는 죽음의 무릎에 살며시 앉는다.



3.
'주시경전'(김세한 지음, 정음사 펴냄, 1974)을 읽다.
15종의 자필 이력서(1910년 전후 주시경이 이렇게 많은 이력서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또 그게 배재에 남아 있는 까닭은...)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전기에서도 주시경의 1901년부터 1905년까지의 행적이 분명치 않다.
이 책에서는 1901년 1월부터 외국인 韓語연구소에 초빙되어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력서에는 한어연구소라는 말은 없고 그저 '선교사들에게 조선어 문법 교수' 정도로 기술되어 있다.
배재 입학 이후에는 해마다 특별한 활동사항이 몇 건씩 확인되는 것과 비교해 봤을 때,
그리고 1906년부터 주시경의 본격적인 국어학적 활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1901년터 1905년까지의 4,5년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그가 흥화학교 양지과에서 측량술을 배우고 정리사에서 수리학을 학습하는 시기도 이 직후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1908년경 상동교회-청년학원-이화학당 계열과 멀어진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해 12월 한달 만에 이화학당 강사를 그만두었을 뿐만 아니라, (예정되어 있던) 딸의 입학까지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 그 이후부터는 하기강습 장소가 청년학원에서 보성으로 옮겨졌고, 새로 세워진 조선어강습원 역시 보성에 설치되었다.

그의 정치적 성향 역시 궁금한 부분이다.
20대 초반 독립신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깊이 관여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나,
그 이후에는 특별한 정치적 활동을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어강습원이나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모듬, 한글모) 등에 관여한 인사들을 보면 그가 당시 가지고 있던 정치적 지향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강습원 초대 원장(1911)과 조선언문회 3대 회장(1913)을 지낸 남형우는 당시 신간회 활동을 하고 있던 이며, 상해 임정 등에서 신채호 등과 협력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가 보성 2회 졸업생이고 그 후 보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상동교회와의 결별 계기가 남형우 혹은 보성 쪽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