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다른 우주의 문법>

pourm 2025. 12. 2. 16:05

1. 
그런 콤플렉스가 있었다.
왜 언어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일테면 김현이나 김우창 같은 글쟁이가 없는가.
미문에 대한 동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다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 같은, 그리고 그러한 문장을 지향해야 할 모범으로 간주하는 언어학 연구자들의 분위기에 나는 질식할 것만 같다.

물론 고종석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자의식과는 별도로 그를 언어학 연구자로 인식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어쨌거나 기자이다. 송건호가 역사, 리영희가 국제정치라면, 고종석은 아마도 전무후무할 언어학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였다. 

나 역시 고종석의 글을 읽으며 '다른' 언어학을 꿈꾸었듯, 백승주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으나, 백승주는 움베르트 에코와 롤랑 바르트를 읽으며 자신의 다른 언어학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2.
이번 가을 나는 백승주의 <다른 우주의 문법>을 읽으며, 예의 그 콤플렉스를 말끔히 날려버렸다.
김현, 김우창이 아니라 그의 문장은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를 닯았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그의 언어학을 읽으며, 나는 황홀했다.

실제로 <다른 우주의 문법>은 판타지와 SF 소설이 넘나드는 다른 언어학이어서, 마치 잘 편집된 소설집 한권을 읽은 느낌을 들게 한다. 이 책의 한 장은 아예 빼어난 단편 소설이기까지 하다! 

그와중에 그의 지적 여정은 또한 예측 불가, 종횡무진.
예컨대 '그녀'가 성차별적인 어휘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그의 시선은 동서양 미술사와 근대 문학을 거쳐, 근대성의 본질을 좇는다. 근대적 언어 인식의 특수성. 전기수가 아니라 근대소설의 문장은 어떻게 왜 다른가.

제주 출신의 그가 (언어적) 소수자들의 감수성을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서늘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할 때 나는 왠지 아찔해진다. 그리고 나의 뭉툭한 감수성에 아득해진다.

그가 소개한 (언어적) 소수자 중에는 인어도 있다. 인어? 그렇다. 인어(人魚)! 인어공주의 그 인어말이다. 인어의 언어는 언어인가 아닌가.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그는 이렇게 괴팍한 방식으로 던진다. 
거듭된 그의 고약한 질문은 다른 언어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우주를 우리에게 상상하게 한다.


3.
오늘 그가 나의 동지라는 사실에 문득, 감격한다.
그리고 그를 질투하지 않는 나를 대견해 하기로 한다.
김현이나 김우창,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를 존경할 뿐, 질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듯,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그리고 그가 나의 동지라는 사실에 오늘 다시, 든든하다.

2025.11. 倡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