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pourm 2025. 12. 26. 16:02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다다서재, 2021


1.
인문학/한국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
예컨대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핵심으로 하는 '내재적 발전론'은 한때 한국 역사학은 물론이고 문학사를 규정하는  정치경제학이었다. 근대의 시점을 영정조 시기까지 끌어올리는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가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있음은 물론이다. 

문학사에서의 근대를 19세기 말까지 내려 잡는 경우라 하더라도 예컨대 근대적 서사 양식(소설)의 기원을 전통적인 서사물에서 찾으려하는 시도 역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정치경제학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2000년대 이후 탈민족주의, 탈시민주의, 트랜스내셔널 담론은 그렇다면 어떤 정치경제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국민국가 담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진보적으로 보이는 포스트/트랜스 담론은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는 자본의 논리,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정치경제학 비판이 필요한 이유.
 

2.
"탈성장 코뮤니즘"
이 책은 맑스의 사상을 다르게 읽자고 제안한다. 소련식의 국가사회주의가 아니라,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말이다. 맑스 만년의 연구는 근대 사회가 공유하는 가속주의, 성장주의를 탈피했다는 것. 

우선, 자본 1권의 말미. 맑스는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농업 문제를 통해 자본의 무한 축척은 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파국으로 몰고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생태주의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더 많은 자유와 평등으로, 더 많은 생산을!'이라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발상은 맑스의 생각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 물론 이는 만년의 맑스에 해당하는 해석. 그의 자연과학, 생태학 연구는 자본 1권 이후 더 본격화 된다.


3.
따라서 더욱 중요한 대목은 자본 1권과 2,3권의 간극. 새로운 맑스 엥셀스 전집(MEGA)의 편집자이기도 한 저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대범한 주장을 펼친다. (이전의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방대한 분량의 연구 노트가 새로운 전집에 망라된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맑스는 2,3권을 완성하지 못했다. 지금의 2,3권은 미완의 원고를 엥겔스가 정리한 것. 맑스는 자본 1권을 마치고(1867년) 세상을 뜰 때까지 17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왜 2,3권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을까? 
1권을 마친 후 그가 전혀 다른 사상적 전망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2,3권의 체계도 전면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추론. 


전혀 다른 전망이란? 놀랍게도 맑스는 전통사회의 공동체를 자본주의 극복의 모델로 보았다. 생태학 연구에서 시작한 말년의 맑스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 예컨대 러시아의 미르나 게르만족의 마르크협동체를,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지속 가능한 꼬뮨의 모델로 보고 연구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맑스가 자본 1권 이후 전념했던 생태학과 공동체 연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꼬뮨이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먼즈(공유지/공통장)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
그가 말한 자본의 본원축적, 시초축적이란 바로 이 커먼즈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커먼즈의 해체가 현재에도 끊임 없이 지속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인클로저를 통한 본원축적이란 단지 자본주의의 전사(前史)가 아니라 자본 축적의 본질을 드러내는 개념이라 해야 할 것.

 



4.
커먼즈의 회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클로저/울타리치기를 통해 공유지에서 배제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배제된 것은 공유지에서 풍부하게 공유되던 삶의 지혜, 그리고 말과 몸,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정동, 더 나아가 거기서 이웃, 자연과 맺어 가던 관계이다. 

물론 그것을 대신한 것은 과학적 지식과 이에 기반한 이성. 공유지에서 공동체를 치유하던 노인이 마녀 사냥의 먹잇감이 되는 것 역시 그때이다. 마녀는 인클로저에 의해 커먼즈가 해체되는 것에 저항했고, 과학/이성에 의해 억압되어야 할 신비를 지닌 존재였다.

따라서 커먼즈의 회복이란 공통장에서의 관계 맺음, 그리고 근대 사회에서 배제된 정동과 공동체적 지혜의 현대적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등가 교환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증여와 답례의 호혜적 관계가 흘러넘치는 어소시에이션이 맑스의 코뮨과 평화롭게 조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5.
다시, 인문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계.
이른바 근대의 과학은 커먼즈의 해체에 복무해 온 지적 담론이 아닌가?
예컨대 '언어적 근대'란 언어학이라는 유력한 과학/담론/제도의 도움을 받아가며 커먼즈의 끊임없는 해체를 거듭해 간 과정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악마의 맷돌'은 단지 시장만은 아니었던 것.

본래 풍부한 구술성/서사성으로 자신의 삶을 노래하던 이들이, 마치 생산 수단을 박탈당하고 빌가벗겨진 노동자가 되듯이, 근대 사회에 돌연 '문맹'이라는 이름으로, 그리하여 문식력을 획득해야 할 존재로 주체화/종속화된 것은 아닌가? 문맹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근대사회에 와서이다.

인클로저로 인해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이 시장에 편입되어 임노동자로 거듭나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랑그에 접속해야 했고, 또 그에 기반한 문해 인민이 되어야만 했다.

국가와 시장이 공히 요구하는 근대인의 리터러시 능력은 커먼즈의 해체와 과연 무관한 것인가?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이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 중에 하나는 최소한의 리터러시 능력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유지에서의 구술성/대화성을 잃고 근대적 문어의 세계에서 독백하는 고독한 존재가 된다. 


무엇보다도 근대에 와서 언어는 정보전달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발화/언어행위/대화의 정동은 제거되고 앙상한 문법 규칙과 메마른 어휘들만이 남는다.
17-18세기 언어 기원론은 '언어'의 발명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언어 인식의 기원이거니와(그 이전에는 단지 '말하는' 인간이 있었을 뿐, 어딘가에 존재하는 언어를 가져다가 '사용하는' 인간은 없었다.) 여러 언어 기원론의 핵심은 정동의 분리였다.

6. 
'근대'를 전혀 다른 배치에서 바라 보기.
그때에만 비로소 '전망'이 보일 터. 단지 비판을 넘어선. 

(2025.12.25. 倡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