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난 가족'에 대한 단상

삶읽기 2004. 9. 7. 13:26


가족은 사유제와 기원을 같이 한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말한다.
'내 재산'을 '내 아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는 필요가 '내 피'와 '남의 피'를 구분하게 했다.
내 피와 남의 피의 구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순수한 '내 피'를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의 '바람'은 죄악이된다. 불결이고 욕됨이다.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의미 없는 소리이다. 대안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기 때문.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관계와 생활 방식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라는 말은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사회다, 라는 말.

영화 '바람난 가족'은 "지금의 가족 관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남편도 힘들고 아내도 죽겠고, 입양된 아이는 더더구나 미칠지경이고,
배에 복수가 차오르는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찾아가라하고, (시)어머니는 자기가 잘못 살았다고 한탄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족 제도는 어떤것인가?


영화의 결말부에서 변호사의 부인(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good lawyer's wife'란다)은 옆집 고딩과의 관계에서 얻은 아이를 배속에 품고 이혼한다. 상투적이다. 하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새로운 관계도 이 상투 속에서만 의미 있을진저.


가족의 균열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균열이 둘쭉날쭉 패인 홈에 매몰되지 않고 매끄러운 탈주의 선을 타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생산 과정을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의 균열과 접속해야 한다.
가족의 기원이 사유재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길버트 그레이프'와 비슷하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가족으로 인해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가족 그 자체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에 대해 문제제기 한다는 점에서. 조니뎁은 간접적으로, 문소리는직접적으로였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할머니의 팔순 생신 때문에 경향 각지에서 모인, 할머니의 아들딸손주며느리생질당질....나에게 숙부, 당숙, 고모, 당고모가 되는 이들, 그리고 호칭조차 불분명한 사람들과 어울려 '가족' 행사를 했다. 근 스무 시간 동안.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상가와 결혼식에 찾아가 또 다른 형태의 가족 행사에 참여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는 분명 꿈틀거리고 있지만그것의 실현은, 지리멸렬하고 괴롭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 역시 분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서도준비되고는 있지만,못지 않게 지리멸렬하고괴롭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 없인 가족 관계의 변화 없다?
가족 관계의 변화 없인 사회적 관계의 변화도 없다!

(2003년 10월어느날의 메모에 가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