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밥벌이 2004. 9. 21. 13:18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

송준,심산문화




저널리즘 비평을 위한 변명


모두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는 중흥기에 있다.’ 올 한 해만 해도 천만 관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세계 3대 영화제의 감독상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투자처를 잃은 자금이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영화 관련 각종 펀드가 조성되고 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 영화는 위기다.’ 영화판은 몇몇 메이저 배급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고 게다가 이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분쟁의 와중에 있다. 천만 관객이라는 과실을 따 먹은 건 몇몇 영화에 한정되어 있고, 비주류 저예산 영화는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게다가 스태프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와 때맞춰 영화 관련 저널리즘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모든 일간지가 주말 즈음에 영화 관련 섹션을 마련해 놓고 엄청난 양의 영화 정보들을 쏟아 내고 있으며 영화 전문 잡지도 여러 개가 활황 중이다. 영화 기사와 영화 비평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영화 기자가 곧 영화 평론가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공중파 역시 신작을 중심으로 각종 영화를 분석하고 비교하고 해설해 준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의 영화 비평과 영화 저널리즘은 죽었다.’ 몇몇 비평가들이 고정 칼럼을 맡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화 비평은 영화 기자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별 차이가 없는, 게다가 기사인지 홍보 문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글들을 관객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급기야 각종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다 관객들이 직접 올린 솔직한 감상문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두가 묻지만 모두가 난감해하는 질문. ‘한국 영화 문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는 그러한 질문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건강한 영화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10여 년 영화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에도 왕성한 비평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저자의 제언이다. 지금 영화에 쏟아지는 언어들은 대개 경제적 이윤과 물리적 규모라는 상업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거대한 영화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하다. 때문에 영화 비평이 자본의 논리, 시스템의 논리와는 별개의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것을 획득할 때만이 건강한 영화 담론이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그리고 저자에게 그 독자적 관점이란 바로 ‘작은 영화, 변방의 이야기, 아웃사이더적 삶’에 대한 옹호이다.



비루한 것들에 대한 옹호


‘선택과 옹호.’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추구하고 있는 비평은 결국 이 ‘선택과 옹호’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 영화의 어떤 점을 옹호하는가.’ 이 점을 명확히 할 때만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설 수 있고, 그런 영화 비평이 영화 담론의 주류를 이룰 때만이 ‘다른’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선택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또 그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옹호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저자는 ‘작은 영화’들을 주목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내놓고 흥행을 노래하지 않은 영화들이다. 이렇게 흥행에 목을 매지 않으려니 부득이 저예산 체제로 제작된 것이 많다. 상업적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바탕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감독 득의의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영화적 표현과 영상 언어들도 검증되지 않은 신선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의 변방은 물론 영화적 변방, 즉 비할리우드 영화를 뜻한다. 스페인 영화(<그녀에게>)와 멕시코 영화(<프리다>)를 앞장세운 영화평은, 에스키모인들(<이타나주아>)과 이란의 쿠르드족 사람들이 만든 영화(<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를 거쳐, 영국(<블러디 선데이>, <오! 그레이스>), 프랑스(<아멜리에>, <8명의 여인들>), 호주(<토끼 울타리>), 일본(<자토이치>, <간장선생>, 중국(<투게더>), 그리고 한국 영화(<오아시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올드보이>) 등등과 같은 변방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작은 영화’로 만들어진 ‘변방의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들의 삶에 적극적 연대의 시선을, 떨리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이란/이라크/터키 접경지대에서의 고단한 삶을 녹이기 위해 말에게 술을 먹여야만 했던 어린 쿠르드족 이야기, ‘야만스런’ 원주민들 속에 ‘고결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를 버려 둘 수 없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살뜰한 ‘배려’ 덕분에 토끼울타리를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을 개선하라는 평화 집회에 참석했다가 난데없이 ‘피의 일요일’을 경험해야 했던 북아일랜드인들의 가슴 아픔 기억,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만이 장미를 얻을 수 있다고 외치는 어느 노동자의 좌충우돌 노조 결성담 …… 등등이 더 이상 우리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거나 배회하지 않고 합당한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를 담은 변방의 작은 영화들. 이 스크린 위의 몸짓과 소리들은 저자의 풍요로운 문체 속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때로는 간결하고 격한 호흡으로, 때로는 나지막하고 기름진 문장으로 자신이 선택한 영화를 옹호하는 38꼭지의 비평은, 저자가 상찬해 마지않는 그 38편의 영화들이 거둔 미학적 성취를 비평 쪽에서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비평이 어엿한 예술의 한 장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안도현, [그리운 여우](창비); [서울로 가는 전봉준](문학동네)

책일기 2004. 9. 16. 13:21


1.

어떤 이에게 해 줄 멋진 말이 없을까 하고(멋진 말이란 게 대개는 돌아보면 십중팔구 유치한 말이 되어 버리지만) 눈을 희번뜩이고 여기저기 둘러보다 어느 시인의 시집을 한권 빼어든다.


문학동네에서 [포에지 2000]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으로 벌린 기획 시리즈 중 한 권. '우리 시문학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절창을 복원해 낸다'고 출판사는 책날개에서 기염을 토한다.

사십대 중반이 넘었을 이 시인의 20대 사진이 표지에 걸려있다. 정말 비린내가 난다, 고 할 정도로 애띤 얼굴이다. 이이도 그동안 살이 꽤나 붙었군, 하며 동류의식 비슷한 걸 느낀다.



읽히지가 않는다.

방바닥에 모래를 뿌려 놓고, 아니 자갈을 깔아 놓고 누워 있는 듯 거북했다.

누군가 90년대, 특히 중반 이후의 시가 연성화 되어 연애시 수준이라며 눈을 흘기더만....... 읽을 수도 없는데 쓸 수 있을 리 만무다. 이렇게 등짝이 배기는 걸.......80년대 시


2.

오히려 오랜 동안 눈을 잡아 끈 건 속지에 내가 괴발새발 쓴 몇 자.

“영풍문고에서. 1997.7.20.kbm”

97년에도 시집을 샀구나 하는 생각.

이제는 책을 살 때만 써먹는 내 필명 케이비엠. 다 짠하다. 뭔지 모르게.


3.

그리고 맨 위에 휘갈겨 쓴 어떤 이의 삐삐번호.

015-8435-1774. 번호만 있고 이름이 없어 누구의 번호인지 모르겠다.

누구일까. 나는 이 번호를 누르고 또 어떤 말을 속닥거렸을까.


내가 처음 받은 삐삐 번호는 97년 2월, 졸업식날, 후배들로부터 받은 015-8435-3964다. 그날 너무 좋아 나는 신촌의 '자유인 투'라는 술집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술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삐삐 왔습니다!!

누군가 집에 가다 나한테 삐삐를 쳤더랬다. 다 짠하다 뭔지 모르게.



4.


나와 잠자리의 갈등1


다른 곳은 다 놔두고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고




이런 게 90년대 시의 연성화라면, 나 연성화에 한 표 던지련다.


5.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눈이 내린다고 시인은 했는데,

아침부터 그야말로 지지리도 못난 내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비가 내렸고,

나는 일어나서 내내 비가 그치기를 기원했다.

요행이도 비는 그쳤지만, 비 그치기를 바랐던 이유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2003.10.13. 메모)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책일기 2004. 9. 15. 15:59



여름휴가 기간(8.27~9.2), 지리산 여행을 다녀와 유종호 선생의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를 읽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가소롭게도 나는 어느 때인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무엇은 기억되고 무엇은 잊혀지는가, 기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였을 터이다. 아마 술먹은 다음날 끊어진 필름을 이리저리 조합하여 맞추다가 문뜩, 든 생각이었을 것이다.

기억은 분열의 소산이다, 라는 게 그날의 생뚱맞은 결론이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의 행동을 치어다 봤을 때 기억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이 생각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어제의 행동이 분열되지 않은 순수(?)한 나 자신의 행위였다고 자위할 수 있게 해 주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가소롭기도 하고 생뚱맞기도 한 이날이 결론은 그러나 전사(前史)가 있다. 내 기억 중 비교적 이른 것일 텐데, 일고여덟 살 무렵 어머니 심부름으로 아파트 연쇄점(체인점의 번역어임에 틀림없을 이 말로 그때는 슈퍼를 지칭했다)에 다녀오던 나는 소년한국일보를 읽고 있었다. 대략 네 면짜리의, 만화나 소년기자들의 볼품없는 기사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을’ 그 신문을 나는 길을 걸어가면서, 그것도 활짝 편 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기억의 화면에는 신문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약 45도 각도로 뒤쪽에서 카메라로 잡은 듯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신문과 내 손만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 기억에는 신문 보는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의 행위를 보았을 때 기억은 발생한다. 고로 기억은 분열의 소산이다.

대학 2학년 때 쯤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벤야민 관련 책에는 그 자신이 유년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불과 서너 살 때의 일을 너무나도 선명히 기억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심한 이물감 같은 것을 느꼈다. 여서일곱 살 때까지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나로서는 그에게 콤플렉스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게 당연하다. 그러나 기억은 분열의 소산이라는 가소롭고 생뚱맞은 그 어느 날의 깨달음은 그런 콤플렉스를 연민으로 바꾸어 주었다. 아주 어린 시기부터 분열된 삶을 살았다니, 벤야민 그의 삶은 정말 우울했을 것이다.

유종호 선생의 [나의 해방 전후]는 그가 국민학교를 입한한 1940년부터 중학교를 졸업한 1949년까지의 10년간에 대한 기억이다. 그의 기억력에 정말 경의를 표한다. 정말 놀라운 것은 동급생의 이름을 거의 몽땅 기억해 내는 부분인데, 창씨개명한 이름과 그 후에 우리식으로 다시 바뀐 이름을 모두 기억해 내고 있다. 국민학교 6년 동안의 모든 선생님들(중간에 바뀐 선생, 옆반 선생, 교장 선생 등등을 포함하면 열댓 명이 훌쩍 넘어간다. 나는 우선 국민학교 일한년 때 담임선생의 이름은 물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은 대체로 2학년 때부터 시작된다)의 이름과 성향, 학교 주위의 여러 풍경들, 해방 되던 날과 그 며칠간의 상황들... 이런 것들 모두가 그의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다.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해방 되던 날 전후의 이야기다. ‘좋다, 좋아’하던 첫날에서 ‘만세, 만세’로 구호가 바뀐 것 같은 류의 시내 쪽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어제까지 일본이름으로 불리고 일본식 내용의 수업을 하던 선생이 오늘 내 이름은 사실은 김 아무개다, 앞으로는 이렇게 불러다오....하는 학교 쪽의 이야기였다. 유종호 선생은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다. 그걸 일본말로 했는지, 조선말로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면서. 요즘의 친일 청산 문제와 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너무 쉽게 친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이 책에는 내 고향이자 저자의 고향인 충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온다. 사실은 그래서 더 이 책을 샀게 되었을 터이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교 은사인 이 양반의 글은 언제나 그렇지만, 단정하고 세련된 품격을 자랑한다. 예전, 한울에서 나온 [아름다운 성찰]에 실려 있던 신경림, 박완서의 글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가졌다, 읽는 내내. 나도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글로 옮겨 보련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