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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근대의 해명을 위하여

1. 주시경은 1906년의 저작 『國文講義』의 말미에서 자신은 국문을 가지고 재주나 넘는 한낱 ‘어릿광대’가 될 터이니 고명한 분들께서 이를 연구, 수정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주시경은 바로 이 시점에 ‘자율적 실체로서의 언어’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때부터 ‘國語’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현실적으로 발화되는 구체적인 음이나 형태가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인 ‘본음, 원체, 격식’을 이 ‘國語’에 연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 시점부터 기존의 기독교적 흐름에서 일정 정도 일탈하여 박은식이나 신채호로 대표되는 개신(改新) 유학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접속’을 통해 ‘國語’는 드디어 어렴풋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일기 2010.03.15

소외의 언어사상

1. 이연숙은 의 머리말에서 근대의 독특한 언어 인식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소박한 화자’는 단지 ‘말할 뿐’이지 ‘어떤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의식하지는 않는다. 마치 모어의 규칙에 맞추어 가며 발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런데 ‘말한다’는 행위에 어떤 근거가 요구되거나 어떤 목적의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언어’는 우리들의 ‘말한다’는 소박한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실체로서 군림하게 된다. 이는 곧 ‘인간으로부터의 말의 소외’라 부를 만한 현상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언어가 단순한 의사전달의 수단이자 도구라는 인식도, 또 언어를 민족정신의 정수로 간주하는 언어 내셔널리즘도 모두 이런 ‘말의 소외’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연숙은 이를 “동일한 언어 인식 시대의 쌍생아”라고 ..

책일기 2010.03.14

자율적 실체로서의 언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결코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된 적이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는 노동(인간),토지(자연), 화폐(매체!)가 상품으로서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하는 19세기에 ‘자율 시장’이라는 관념이 나타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정치의 영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경제, 다시 말해 스스로의 조절 기능으로 작동하는 자율적인 시장이란 개념이 얼마나 새롭고 기발한 것이었는지를 집중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포트래치에 관한 말리노프스키의 설명과 같은 인류학적 연구를 토대로 시장의 등가 교환이 유일한 또는 주요한 거래의 방식이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며 또한 보편적인 것은 더더욱 아님을 설명한 폴라니는, 각종 역사적 사건과 자료를 통해 18세기까지도 노동이나 화폐, 토지와 같은 것을 시장에 ..

책일기 2010.03.12

격물치지

새해가 밝고 한동안 아침저녁으로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설렜다.그 중의 하나가 김용옥의 단순히 주자가 예기의 편을 독립시켜 사서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정도밖에는 모르고 있었으나, 대학에 대한 논의는 한유로까지 소급되고 주자는 이정의 대학 편차에 상당한 변개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억지로 경-전 체제로 만들었다는 것이 도올의 설명.특유의 장광설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큰 틀에서 대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결론은 역시 격물치지.格物이 物에 나아가는 것(주희)이냐, 아니면 物을 바로 잡는 것(왕양명)이냐.사물에 나아가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사물을 바로 잡아서 양지에 도달할 것이냐.사물에 나아가 얻는 이치는 자연과학적 인식과 멀리 있지 않을 터. 도올이 주희를 데카르트에 유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일기 2010.03.04

죄의식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실은 유쾌한 일이며 감상(感傷)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아렌트의 말이란다.한참 지난 을 읽다가 어느 일본 학자의 이 말에 시선이 멈췄고, 후에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용산에 대해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그저 내가 양심적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고 ‘상상’되는 남들에 대한 우월 의식을 ‘즐거이’ 맛보려 했던 것일까?혹시 그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였을까?아니면, 그것은 나 역시 가담하고 있는 욕망으로 인해 빚어진 참극이었으므로 내가 마땅히 죄의식을 가지고 반성/참회해야 하는 일이었던가.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온당한 관점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

책일기 2010.02.16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를 열어라 송경동(앞 부분 줄임)150일째 다섯구의 시신이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있다 150일째 우리 모두의 양심이 차가운 냉동고에 억류당해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차가운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 150일째 이 사회의 역사가 전진하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에 얼어붙어 있다 150일째 우리 모두의 분노가 차가운 냉동고에서 시퍼렇게 얼어붙어가고 있다 150일째 우리 모두의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다이 냉동고을 열어라 이 냉동고에는 우리의 용기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것인 민주주의가 볼모로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

삶읽기 2009.07.20

노무현 ‘서거’ 유감

1.'殺'. '죽일 살'이다. 그러나 왕을 죽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는 '시'로 읽는다. 박정희 대통령 '살해'라고 하지 않고 '시해'라고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따라서 이런 투는시대착오적인 어법이다.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폐하 밑에 전하, 전하 밑에 합하, 그 밑에가 각하란다. 더없이 봉건적 어법이다.)‘노 전 대통령 사망’에서 ‘서거’로 바뀌는 순간, ‘서거’ 역시 그런 봉건적 유습인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그냥 높임말이란다. 따라서 이 말법에는 유감이 없다. 물론 누구의 죽음은 높이고 누구의 죽음은 그러지 않는가, 잠깐 서글펐으나, 문제는 높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낮추는 데 있는 것.2.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불과 1년 반 전 모두가 노..

삶읽기 2009.05.26

`용산’은 묻는다-왜?

한겨레신문 2009.3.24. [야!한국사회] 박수정 르포작가 지난 토요일 밤, 서울에 비가 왔다. 비보다 먼저 ‘용산’은 눈물로 젖었다. 불에 타 죽은 여섯 원혼을 달래는 ‘진오귀굿’(황해도굿보존회 ‘한뜻계’의 공연)이 열린 자리. 만신들과 유가족들, 그 자리에 함께한 시민들이 울었다. 낮 12시에 시작한 굿은 중간에 추모 문화제를 한 뒤 다시 이어졌다. 죽이지 않고 살리려고 했으면, 내치지 않고 구하려고 했으면 ….산 목숨을 잃은 넋들이 어찌 억울하고 분하지 않겠는가. 굿을 하는 동안 만신들이 쓰러지고, 가족들은 까무러치곤 했다. 아무리 통곡한들 원통이 풀릴까만, 추모하려 모여도 불법이라며 광장을 막고 잡아들이는 정부에, 사과는커녕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폭행하고 영정을 깨부수며 가난한 국민 따..

삶읽기 2009.03.24

미네르바의 올빼미

1.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나 날아오른다.그리하여 온갖 흔적들을 살펴보고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혜의 여신에게 일러준다. 필경 그 큰 눈을 꿈벅이며...헤겔은 자신이 그 올빼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로이센을 절대정신의 궁극적 현현이라고 보았으니. 역사의 흔적을 보고그 법칙을 읽을 수 있는 자, 바로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그런 면에서 맑스는 헤겔의 충실한 후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보다 더 늦게 날아오른. (물론'갈리아의 수탉'을 이야기했던 맑스이지만 - 아마도미네르바의 올빼미 운운에어깃장을 놓고 싶었겠지- 그가 스스로를 '수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수탉'은 '갈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였고 그는 그 흔적을 살피고 해석하는 자였을 뿐이다.)미네르바의 날개짓에..

삶읽기 2009.01.13